Archive for month: June, 2011
[주일예배] Father’s Day Joint Service “우리 모두 양자가 아닌가요” (6-19-2011)
Categories: Messages - Series - Special Service“우리 모두 양자가 아닌가요?”
로마서 8:12-17
교회는 예수님의 DNA를 가졌는가?: Got Jesus’ DNA?
Categories: Senior Pastor Article전 세계 이민교회 사역자들을 돕기 위해 창립한 코딤(KODIM, Korean Diaspora Ministry)은 지난 10월 2차 서부지역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코딤은 세미나와 멘토링을 통해 이민신학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도록 돕고 사역자들이 목회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분야별 강의를 요약, 기획연재 한다. -편집자 주
1963년 Western Michigan University 강당에서 Dr.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는 주일 11시는 미국에서 가장 인종 차별이 심한 때 “the most segregated hour in this nation”라고 말했다. 우리가 상상 하는 것처럼 그 시간은 바로 주일 예배 시간이다.
그보다 얼마 전인 1955년에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선교사 출신인 교회 성장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도날드 맥가브란이 Homogenous Unit Principle (HUP) 을 이야기 하며 “사람들은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로 같은 동질성을 가지고 예배 드리기를 선호한다”는 현상에 근거해 HUP를 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도날드 맥가브란의 Bridges of God 이라는 책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면으로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교회 성장학의 두 번째 리더라 할 수 있는 피터 와그너는 이것을 널리 전파했다.
맥가브란 자신은 본인의 이론이 얼마나 다음 세대에 영향력을 줄 것을 예견하고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HUP 는 교회 성장학의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 매김을 했고, 아직도 특히 백인 교회들은 이것을 열심히 마케팅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미국교회 마케팅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미국 전형적인 도시에서 백인 중심의 대형교회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래도 이해는 가지만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허물기 힘든 배경을 이해하는 면에서), 오랫동안 선교지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왜 선교사들의 부족한 언어와 제한된 문화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20세기에 그처럼 heterogeneous (다른 인종,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가진) 선교사들을 통해 선교의 불을 일으키셨는가?”란 질문에 하나님 앞에 올바로 답변해야 할 것이다.
맥가브란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던 그것을 교회 성장의 한 정당한 요소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재미를 톡톡히 봤다. 놀랍게도 미국에서 1960년에 출석교인 2,000명이 넘는 대형 교회는 불과 16개였다. 그러나 2005년 현재 출석 교인 2,000명이 넘는 대형교회는 무려 1,210개로 늘어났다. 교회 성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증거하며 교회는 당연히 성장해야 한다. 그리고 맥가브란의 HUP 요소만으로 교회가 그렇게 대형화 되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듯이 그 수많은 미국 대형 교회들의 대표적인 교회들은 모두가 아예 백인 중심이거나 흑인 중심이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동질성 집단이 주를 이룬 나라에서는 특별한 비판 거리가 되지 않겠지만, 다민족으로 모인 Melting Pot인 미국 사회에서 종종 “교회는 가장 인종 차별이 심하며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한(intolerant) 집단”이라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 복음 전도의 문을 막는 비판 요소를 제공한 셈이다.
마틴 루터킹의 선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 되고 있다. (물론 짐 심발라의 New York Brooklyn Tabernacle, Erin McManus의 Mosaic Church, 데이빗 기본스의 New Song 등의 좋은 다민족 교회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맥가브란의 HUP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재 HUP를 교회성장의 한 요소로 사용하여 성장한 교회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었는지 의심이 든다.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백인은 백인끼리 모여 교단을 만들고 선교하고, 흑인은 흑인끼리 모여 교단을 만들고 선교하고, 한국인은 한국인끼리 모여 교단을 만들고 선교한다. “끼리 끼리”는 잘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시는 것 같다. 아니 성경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민을 와서도 우리는 늘 한국 사람끼리 모인다. 필자에게도 그런 모습이 당연히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징벌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죄성(by sinful nature) 가운데 나온 현상에 기인한 우리의 분리성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맥가브란의 HUP를 받아 들였고, 그 중에 전형적으로 그것을 적용한 사람 중에 하나가 빌 하이벨스와 릭 워렌 이다. (필자는 릭 워렌과 빌 하이벨스의 악영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비판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놓치는 그들의 훌륭한 점들도 있다) 빌 하이벨스는 책에서 밝히듯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20-40대 백인 중상층을 타겟 그룹으로 했다.
우리 같으면 영어도 부족하고 문화도 다른 이질감이 많으니까 처음 교회를 시작할 때 한국 사람을 core group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시카고에서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있는 그런 다민족 기회의 도시에서 과연 하나님은 백인들만을 위한 대형 교회를 원하셨을까?
사실 몇 년 전에 빌 하이벨스는 Christianity Today에서 이점을 시인하고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고 후회 했다. HUP 같은 이론을 목회 초창기부터 교회 성장의 원동력으로 사용했던 것을 “I was too naive, 내가 너무 순진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지금 다민족 교회로 되 돌이키기에는 교회가 체질적으로 너무 백인화 되어 있다는 면을 여러 다민족 대담자들 앞에서 고백했다. 그래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며 다민족들을 리치 아웃하려는 시늉을 한다면 그래도 빌 하이벨스는 다른 콧대 높은 백인 대형 교회 목사들보다는 열린 사람인 듯싶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HUP 는 인간의 죄 성에 근거한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을 교회 성장의 원리로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비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형성될 때 Homogenous Unit (동질성 집단으로 모이는) 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사역자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교회 성장의 숫자적인 생각으로 목회에 적용하면 편협적인, 그리고 때론 인종 차별적인 목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교의 역사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는 어느 부류의 어떤 문화의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 때문에 교회의 성장이 더디 다고 하더라도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라는 신념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 성장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다운 영적 질적 성장이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마케팅이나 전략이전에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본질의 모습이 무엇인가 늘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늘 교회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좀 더 수준 높은 관점에서 목회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결국 이 질문은 “교회가 예수님의 DNA를 가졌느냐”로 귀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신분이 다른 분이다. 사용하시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분이다. 죄인 된 우리와 전혀 어울리시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 6-7).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Cross culture 하셨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때로는 더딘 일이고, 때로는 비판받는 일이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인지 스스로 보여 주셨다. 그런데 그런 DNA를 갖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무한한 다민족 선교의 기회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 대형 교회의 예를 들어) 재정 1,500만 불에 1년에 20명 침례주고 99% 백인 출석을 자랑한다면 과연 교회가 예수님의 DNA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자 챨스 밴행겐은 God’s Missionary People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곳이므로 모든 사람을 교회로 들어올 수 있도록 초청하고 불러들이는 일을 계속 해야 한다.” “교회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질 때 그 몸은 보편성을 가진 모습을 드러낸다”(엡 3:1-13).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1995: 74-75).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2절은 줄곧 암송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그 다음구절은 잘 잊는 듯하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살아나가면서 갖고 있는 우리의 한계점들, 문화, 언어, 인종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 하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뛰어 넘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라면 우리는 어떤 면으로 보나 예수님이 하신 cross culture를 날마다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3절)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Homogenous Unit Principle은 오직 예수 DNA이다. 이민 교회의 성장이 더디고 환경이 힘들더라도 힘내시기 바란다. 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한 지붕아래 있는 지역 교회들이다. 능력도 다르고, 달란트도 다르고, 처한 환경도 다르다. 그러나 교회의 섬기는 리더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DNA, 곧 성육신의 피를 바탕으로 모든 부류의 다양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겠다. 그것이 피부 색깔이 다른 다민족들이든, 문화가 다른 다양한 이민 사회속의 한국 사람들이든, 마음을 넓게 열고 “오직 예수” “Jesus-genous Unit Principle”을 갖고 복음을 외치자.
나와 피부 색깔과 문화가 다른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올 때 천국 잔치의 기쁨은 배가 되고, 교회는 예수님의 DNA가 더 해 질 것이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DAN를 가진 교회인가? 교회 성장 학자 Mark Dever가 말했듯이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백보좌 심판 앞에서 우리 목회자들을 엄문 하실 것이다. Got Jesus’ DNA?
목회 칼럼
Categories: Senior Pastor Article다음 글은 최성은 목사(타코마제일침례교회 담임)가 4년 전에 쓴 칼럼이다. 본지는 한인이민교회에 필요한 내용이라 판단,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이번에 칼럼을 게재한다. – 편집자 주
요즘 복음주의의 본질을 퇴색시키는 슬픈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또 주님의 제자로서 정말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늘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은 제외하고서라도 일부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최근의 실수들을 두 가지 이야기로 예를 들어본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교회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크리스천 신문의 한 칼럼난에 오프라 윈프리(Oprah Winprey)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녀가 어떻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공하였는가를 감동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오프라를 복음주의 크리스천으로 소개하며 그녀의 힘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프라는 미국에서 시행되는 갤럽조사마다 미국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선정되는 단골손님이다. 한 예로 마이클 잭슨이 오프라의 쇼에 출연했을 때 시청률이 9천만 명에 육박했다. 그녀의 영향력과 리더십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다.
그러나 오프라가 어린 시절 침례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녀는 복음주의 크리스천도 아니고 회심한 크리스천도 아닐뿐더러, 요즘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러듯이, 오히려 하나님과 예수님을 빙자한 새로운 뉴에이지 운동의 한 사람의 기수이다. 그녀는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는 New Spiritualism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최근에는 자신이 삼위일체의 네 번째 “fourth person”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에도 불구하고 오프라는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성공적인 크리스천으로 소개되며 미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크리스천들의 입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로 부각되어 진다.
Houston, Texas에서 아버지 John Osteen(1929-1999)의 교회를 물려받아 목회하는 Joel Osteen은 Lakewood Church를 몇 년 안에 30,000명이 넘는 대교회로 성장시켰다. 필자는 4년 전부터 그의 설교를 자주 들어왔고 처음부터 그의 화술과 설교에 매료되었다. 그는 화술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고 부담을 주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격려하고 동감하게 만드는 놀라운 재주가 있다(이 점은 모든 설교자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데는 동감한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1년쯤 듣다보니 고민이 생겼다. 너무 듣기 좋고 신기할 정도로 말을 잘하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에게서 십자가나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지 못했다. 부임 후 처음 일 년간은 많은 성경구절을 다 외워서 적시 적소에 잘 사용하는가 했는데 요즘은 그의 설교에서 성경구절을 찾아보기 힘들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의 주제를 뒷받침하는 인용구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CNN의 Larry King Live에 단독 출연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sinner”(죄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질문에 대해 분명하게 “I don’t use it. I never thought about it.” 그는 죄와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매 주일 “positive stuff” 긍정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성경(the King James Bible)은 죄라는 단어를 무려 830번 이상 언급 하고 있다. 오스틴의 CNN 인터뷰는 많은 파장과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인가?”라는 질문에 Yes나 No의 답변을 피하며 너무나 성의 없는 대답으로 복음주의 크리스천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결국 자신의 웹사이트에 공개 사과를 하며 예수는 당연히 그리스도라며 그 답변을 수정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들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놀랍게도 오스틴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개적인 TV쇼에서 그 기본적인 답을 확신 있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오스틴은, 좀 과장이겠지만, 한국에서 이미 시대가 낳은 복음전도자 빌리그래함 목사님만큼 유명해졌다. 한국에서 번역된 오스틴의 베스트셀러 Your Best Life Now (긍정의 힘)는 한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추천서를 개재하며 마치 죠엘 오스틴이 미국을 이끌어 가는 떠오르는 복음주의자인양 소개하고 있다. 목회자를 위한 한국의 유명한 전문 웹에서도 아예 그의 영문 설교를 매주 볼 수 있도록 링크를 올려놓고 있다. 그 실용주의에만 바탕을 둔 오스틴의 강의와 철학을 배우며 영향력을 받는 신학생들과 교인들의 신앙을 누가 책임질지 걱정이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겠지만 이민목회 속에서의 목회자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제대로 된 목회자라면) “매 주일 무엇을 설교 할 것인가?”일 것이다. 4,000여 개의 이민교회가 있다고 하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는 성도수가 100명을 넘지 않는 아담한 교회이다.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분위기 속에서 목회자로서 매 주일 십자가와 회개에 대한 가볍지 않은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성도들 역시 부담 주는 설교자를 본능적으로 피한다. 현재 젊은 미국 교회 목회자들의 특징은 Didache(도덕적, 교훈적)적인 설교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10년 넘게 미국 목회자들의 설교를 조명한 바로는 설교의 적용부분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미국설교의 장점이기도하다. 수천 년 전 성경 본문의 내용을 현실세계의 나의 삶의 자리까지 끌어오는 해석학과 본문 적용은 설교자의 기본 과제이며 당연한 의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고 적용적인 설교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니 Kerygma(신약 성경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적인 설교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상당수 중소형 교회에 다니는 오래된 교인들도 Didache적인 설교에만 귀가 훈련되어 있는 듯하다. 사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상 휠씬 듣기 편하다.
필자의 조심스런 소견으로는 한국의 복음주의 설교는 대체로 미국의 형편과 반대로 Didache적인 설교보다는 Kerygma적인 설교가 더 많지 않나 생각한다. Kerygma적인 설교를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방법이 너무 지루하거나 교리적이고 않아야 하고, 오히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고민과 만나는 철저한 몸부림의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케리그마적인 설교도 당연히 교훈적이고 삶과 밀접한 적용이 필요하다.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John Stott, Michael Green, Robert Mounce, Craig Loscalzo, Lewis Drummond 등이 지적한 대로 C. H. Dodd가 주장한 Kerygma와 Didache에 대한 너무 분명한 구분(too sharp distinction)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은 케리그마와 디다케 두 가지를 다 중요하게 여기셨고 균형 있게 사용하셨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설교와 도덕적인 설교의 비중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오스틴의 예처럼 일부 복음주의의 경향이 복음의 본질의 내용까지 흐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프라의 쇼가 마치 하나의 종교인 양 추앙 받는 것이나, 그 성공담을 여과 없이 설교의 예화로 삼고, 악덕 기업인이었던 록펠러가 아직도 한국인의 십일조 설교에서 영웅으로 등장하고, 죠엘 오스틴의 설교가 하늘을 찌르듯 인기가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복음과 십자가에 대한 본질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해도 성도가 불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복음주의 설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설교의 위기는 곧 신학의 위기이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 참조-갈 6:14)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 신학의 정수이고 설교의 핵심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들의 가려운 데만 긁어주고 놀라운 화술과 웅변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해도 십자가를 통해 성도들이 숨기고 있는 썩어져 가는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주인인 예수님 앞에 교회성장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며 사람들 가운데 목회를 하더라도, 언어의 둔함과 지역의 한계 때문에 교회 성장이 더디더라도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사랑의 메시지로 성도들을 치료하고 사랑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교회 성장이 어디 있겠는가? 오프라의 카리스마와 죠엘 오스틴의 화술이 없더라도 어둔한 언어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민 성도들의 아픔을 포용할 수 있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위로하시지 않겠는가?
아담한 교회이지만 부족한 설교이지만(설교 준비와 기도가 부족한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부족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심장 깊숙한 곳에서 불을 뿜듯 토해낼 수 있는 설교자라면 무엇이 부러울 것인가?
오프라를 거듭난 교인으로 생각하며 설교의 예화로 사용하는 오류나, 죠엘 오스틴을 복음주의의 기수로 평가하는 실수는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하나의 단편적인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 시대는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설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의 포스트모던의 파도에 휩쓸려 성도들의 필요한 부분만을 긁어주며 잘못된 희망(fake hope)으로 일관하는 교양강좌로 흘러간다면,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케리그마(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선행적으로 선포하는 인기 없는 선지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무엇인가 적용할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felt need)를 충족시켜주는 Didake적인 설교도 의심의 여지없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영혼의 목마름(real need)을 만져 줄 수 있는 복음적인 설교의 우선순위는 결코 타협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시대는 케리그마와 디다케적인 설교의 균형은 두 번째 이야기이고, 오스틴의 예처럼 심리학을 곁들인 화려한 교양강좌가 복음의 본질을 위협한다는 것이 더 화두일 것이다. 그리고 무분별하게 그 성공담을 퍼뜨리는 설교는 오늘도 교인 수에 집착하지 않고 온전히 십자가의 복음 설교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키워내고자 고전 분투하는 주의 종들을 낙심케 만드는 위험한 일이다. 복음의 본질에 관한 설교는 뒷전이고, 일 년 내내 십자가 고난을 통한 성장에 대한 이야기 하나 없이, 사랑과 은혜의 교양강좌를 통한 교회 성장을 이뤄내는 것을 보면 참 말세긴 말세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적용이 훌륭한 미국 설교의 장점은 수용하면서도 실용주의에 빠져있는 미국 설교자들을 지나치게 우상시하는 실수는 철저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사실 어느 영국 청교도의 전통을 이어 받은 설교보다 더 훌륭한 설교는 고난과 핍박 위에 세워진 한국 초대교회의 순교자적인 복음 설교, 십자가 설교라 생각한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바라보며 그러한 순수한 복음 설교가 그 부흥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하겠다.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당연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다 보면 당연히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사도들의 사명이었다. 우리가 누구의 제자인가?
짧은 글이지만 이 글을 통해 어려운 교회, 힘든 상황이지만 성실하게, 쉬워 보이는 길과 타협하지 않으며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의 교회들을 돌보며 십자가를 설교하고, 한편으론 진심으로 성도들의 삶을 어루 만져내는 이 시대의 이민 목회자들을 격려하며 생각해 본다. 사도행전 첫 베드로의 긴 설교의 핵심은 다름 아닌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라는 은혜와 회개의 선포였다. 아무런 교양강좌와 웅변 없이도(물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과 학식에 사람들이 놀라긴 했지만) 그날 회개하며 삼천 명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복음주의 설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초대교회의 설교로 돌아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십자가에 묻어난 피의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거기에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신문 기사 인터뷰] 이민 목회 철학과 방향
Categories: Senior Pastor Article4년 전에 미주 크리스챤 신문인 크리스챤 헤롤드 30주년 기념으로 미주에서 젊은 목회자 3인을 뽑아 인터뷰를 했다. 3인중에 한분인 담임 목사님이 한 인터뷰에 목회 철학 특히 이민 교회와 문화, 2세교육, 다민족 사역의 방향이 잘 담겨져 있다. (인터넷 주소: http://christianherald.tv/html/company/search.asp)
1. 개인 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성함, 생년, 사역지역, 담당사역)
최성은 목사는 한국 침례교신학대학(B.A)과 루이빌 켄터키에 소재한 남침례 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Master of Divinity를 졸업했다. 2004년 James I. Packer, John Stott, David Johns등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동 대학원에서 “An Analysis of John R.W. Stott’s Theology and Practice of Evangelism”란 논문으로 Ph. D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학생부와 대학부를 담당하다가 95년 도미해 루이빌을 중심으로 장거리 운전을 하며 8년간 동서남북 네 곳의 다른 교회에서 영어권 그룹들과 이민 교회를 섬겼다. 그는 복음주의와 전도신학, 강해 설교,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와 예배의 개혁, 셀 그룹에 관심이 많다. 미주 한인 사역자들의 네트워킹인 Korean Diaspora Ministry 의 선교 분과장으로서 이민교회의 사역과 신학에 대하여도 관심이 많다.
2. 30대 목회자의 눈으로 미주 한인교계의 현 모습을 진단해 주십시오.
오늘 질문에 개인적 평가 보다는 최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려고 합니다. 현재 3,500여개의 이민 교회들이 있고 그 중에 90% 이상은 100명 미만의 가족 중심의 소형 교회들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종교심이 강해서 자연스럽게 교회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민 사회에서의 많은 문제들도 이민 교회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현재 미주 한인 교회는 이러한 아픔을 지닌 상처의 공동체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 전도하기가 전보다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민 생활의 아픔을 딛고, 예수님을 만나고, 가정과 개인의 치유와,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잘못된 리더십으로 말미암아 더 없는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제없는 교회없고, 문제없는 사람 없지만, 특히 이민 교회는 이 개인과 공동체의 상처의 문제들을 어떻게 치유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내적 치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제대로 전하기만 한다면 그 안에 모든 내적 치유와 회복이 담겨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참된 복음의 본질이니까요. 요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긍정적인 면들도 있지만 아픈 점들을 정리하자면, 말씀을 통한 상처 치유의 부족, 건강한 리더십의 부재, 강력한 말씀 사역의 부재를 들 수가 있겠습니다.
3. 지난 30년, 선배 이민 목회자들이 놓친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쉬운 점, 개혁해야 할 점 등)
먼저 이 거창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 대해 주의하고자 합니다. 선배 이민 목회자들의 눈물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 교회나 이민 교회는 이 만큼 성장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목회 환경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많은 것들을 주님 앞에 순종하며 헌신한 그분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영성의 터전위에 새벽기도를 하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목회자가 교인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느라, 정작 본업인 말씀 사역에 지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개척 이민 교회를 하면서 때로는 일주일 내내 법원으로, 변호사 사무실로, 학교로, Social Worker처럼 이리 저리 뛰어다닐 때가 있지만, 그들에게 말씀을 통한 본질적인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목회자는 점점 더 비본질적인 일 (물론 그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 있어서)에 매어 달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경쟁의식 때문에 많은 이민 교회가 필요 이상의 출혈을 감수 한 것 같습니다. 좀 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하나가 되고자 하는 글로벌 마인드가 우리세대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교회를 답습하기 보다는 나만의 독창적인 목회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대형교회 선호적인 목회에서 벗어나, 작지만 건강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성숙시키는 그런 현실적인 목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모였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개혁이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한마음의 움직임들이 이런 저런 모임을 통해서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4. 목회의 현장에서 기성 이민세대, 청소년, 어린이 등 그 대상에 따라 목회를 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신다면?
저는 미국에 와서 7-8년을 청소년 영어권을 하다가, 지금은 개척을 해서 1.5세 중심과 1세대를 목회하고 있기에 어떻게 보면 모든 세대를 다 경험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다른 점이라기보다, 특징을 말하자면 1세대는 열정과 헌신이 있고, 2세대는 머리가 있고, 1.5세대는 두 가지를 모두 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세대가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장점을 더 부각시킨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이민 목회를 이해하는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5. 앞으로 한어 예배, 영어 예배, 이중언어 예배에 대한 전망은? (위치, 관계 등)
앞으로 이민은 계속 될 것이지만, 이곳에서의 사역은 1.5세와 2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1세가 갖고 이는 열정과 헌신을 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목회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6. 현재, 교회내 기성 이민세대들과 1.5세, 2세들과의 단절이 심한데 이를 어떻게 바라보시며, 또 어떤 방향(해결책)으로 가야하는지 이야기 해 주십시오.
저희는 아예 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기에 이 단절감이 덜 합니다. 서로 한국말 배우려하고, 영어를 배우려 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처음 개척 초기 바탕부터 아예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에 이 문제가 크지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목회자의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목회자이든지, 아니면 영어가 부족하더라도 영어권 사역자를 이해해 주는 품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이 둘 중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왜 미국에 보내셨나 사명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리더가 어떤 토양을 만드느냐에 따라서 화해의 사역이든지, 단절의 결과이든지 나오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의 피터 차 교수의 현재 연구 발표에 의하면 90년대 한인 교회를 떠났던 2세들이, 일명 ‘Silent Exodus’(조용한 탈출), 가족과 문화적인 이유로 다시 한인교회로 복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차 교수는 “2세들이 1세 교회로 돌아오는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을 받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몇이나 되느냐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당면한 현실입니다. 그는 또 “몇몇의 대형교회에 2세들이 집중되는 것보다 여러 중소형 교회들이 이러한 기회를 잘 이용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더 건강할 것 같다”고 조언했는데, 그러려면 교회의 리더십은 세대간의 화해를 위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신중하게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7.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와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이것은 비단 한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살았던 내쉬빌 LIFE WAY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 청소년들이 18세에서 22세 사이에 75%가 교회를 떠난다고 보고합니다. 그 이유들을 보면 목회자의 스타일, 성도들의 이중적인 모습, 비 소속감이 가장 많았습니다. (Most common was, “church members seemed judgmental or hypocritical”(26 percent). Another 20 percent “didn’t feel connected to the people in my church.”) 전체 58%의 이유들 중에 이러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문화적인 괴리감(cultural irrelevance)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의 12년의 미국 목회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문화적인 괴리감은 젊은층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유입니다. 삶이 너무 공허해서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는데, 교회는 프로그램만 제시하고, 사회에서 해보지 못한 신비한 경험을 하기 위해 왔는데, 교회는 반대로 사회를 답습하고, 교회가 세상을 개혁하기를 원했는데 교회는 세상 보다 한참 뒤져있는 문화와 설교를 들을 때 청년들은 낙심합니다. 해결책이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말씀에 시간을 투자하고, 청년들의 삶과 세상을 연구하고, 세상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해결책이 있을까 생각 합니다. 목회자의 관심이 떠나가면 청년들은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8. 앞으로 30년, 미주 한인교회들이, 한인교계들이, 혹은 한인목회자들이 특별히 지향해야 할 방향이 있다면? (교육, 선교, 예배, 문화 등으로 나누어 설명해 주셔도 됩니다.)
질문이 너무 거창해서 논문을 써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여러 질문에 대한 답변에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정리하자면,
- 교육은 목회자에게 2세를 키우는데 대한 열정과, 1.5세와 2세를 이해하는 품는 사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국 교회는 다른 나라에 비해 여러 면에서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불구하고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주 한인 교회들도 조금만 규모만 있으면 선교에 문을 열고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서로가 네트워킹 하는 사역 그리고 서로가 WIN-WIN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예배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 있다고 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 우리의 삶의 예배를 통한 문화 개혁이라고 믿습니다. 온전한 예배를 통하여서만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문화가 창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죽는다면 교회의 문화도 세상을 따라 갑니다. 이 세상을 연구하면서도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은 결국 참된 예배의 능력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9. 앞으로 30년, 미국 땅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위해서 개인이, 교회가, 교계가, 목회자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저는 개인과 교회와 목회자를 따로 보는 것 보다 우리가 모두 주의 종된 자로서 함께 순종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볼 때, 이 미국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원해도 부흥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먼저 회개의 운동, 말씀을 통한 치유의 사역, 삶의 변화와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회개는 본질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민 교회를 돌아보며 선배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러면서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며 겸허하게 회개하는 운동이 우리 이민교회에 있어야 회복이 가능합니다.
이민 교회는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는 신음하는 공동체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와 상담의 역할이 중요시 대두되고 있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한 본질적인 치유사역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문상담가의 경험과 더불어 말씀의 능력을 극대화하는데 목회자는 힘써야 할 것입니. 사실 이 상처의 문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보면 초대교회에도 넘쳐났습니다. 상담의 기초 지식도 갖고 잊지 않은 그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그 회복을 가능하게 한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말씀 사역과 상담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민 교회는 많은 면에서 삶의 능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힘듭니다. 전도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드물 정도 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참된 전도가 아니라 우리 교회 나오라는 전도입니다. 지금의 세대는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삶의 능력이 함께 동반되어 있는가를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로 얼룩지어진 주님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은, 우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된 거룩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 족한 젊은 목사에게 기회를 주신 크리스챤 헤롤드분들께 감사드리며, 30주년 기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민 교회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함께 성숙하는 하나님의 신문이 되기를 소원 합니다.
[주일예배] 회복시리즈(2) “”용서 받음과 치유 – 야곱의 하나님”” (6-12-2011)
Categories: Messages – Series – Restoration회복 시리즈(2):
“용서 받음과 치유 – 야곱의 하나님”
창세기 33:1-17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Categories: Family Column최수진 사모 (Kingdom Project Director / Education Cordinator)
말문이 늦게 트인 둘째 아들이 요즘 잘 하는 말이 “But” 이다 누나에게서 배운 말을 늘상 써먹는다. 무엇을 하라고 시키거나, 하지말라고 제어를 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첫 마디와 반응은 “but, but , but…”이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돌아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말도 잘 못하는 어린 아들이 배우는 것들은 자기의 뜻을 꺽고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엄마의 권위에 대한 불만감의 표현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막는 엄마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재미없고, 야속하고, 얄미운, 힘이 센, 자신들을 벌 할수 있는, 아직은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이다. 여덟 살인 딸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면 벌써 안색이 변하고 입이 나온다. 엄마가 정당한 이유를 들어 줘도 자신의 뜻이 꺽인것 같아 기분이 상한다.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자신들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권위를 아이들 조차 때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싫어한다는 사실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이다.
“권위,” “순종,” “복종” 하면 우리는 벌써 얼굴을 찌푸리게되고 거부감부터 생기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도 자라면서 “순종해라,”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발끈했다. “여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금방 싸움이 되곤 했다. 내 존재감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죄성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 권위에 대한 반발감과 불순종의 영은 단지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생활의 영역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와 결심, 목표들을 세운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영적인 성숙을 위한 각오와 다짐들도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나의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따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일 것이다. 올 한해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목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가장 쉬운일임에도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 순종이라는 것은 내 삶의 주권이 더 이상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온전하게 따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빼앗아 가실 것 같고, 그동안 말 안듣고 속 썩여 드린것에 대한 약간의 보복(?)의 기간도 있을것 같고, 세상의 것은 다 포기하고 수도사처럼 재미없이 살아야 될것 같은 두려움과 불신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심술맞고 배려가 없으시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재미 없는 분이라는 생각이 많은 경우 우리의 잠재 의식속에 자리잡고 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다. 불순종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선전 포고인 것이다. 바로 우리의 교만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그 것이 죄인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잘 아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착각과 교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지 못하게 한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일지라도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육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하시고 거짓이 없으신 사랑의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더 그러시겠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그 분에 대해 우리가 알아 간다면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분께 내 삶의 모든 문제를 맡기고 따른다는 것처럼 안전하고 보장된 길은 없을 것이다. (2009년)













